살다보면 문득 자신이 여전히 성장해가고 있는 것을 실감할 때가있다. 사실 이런 성장은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지만 생명이 있는 한 지속된다.
성장이란 나무의 경우처럼 크기나 둘레가 단순히 커가는 양적인 증대를 말하고 일상적인 활동의 변화나 생각의 패턴이 새로운 형태로 진행되는 것들을 포함하는 포괄적인 것이다. 우리 몸이 커가고 생각 또한 이미 가진 데이터에 새로운 데이터를 받아들이면서 다른 좀 더 복잡하거나 다양한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변화들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경우다.
이러니 사람에게 성장은 보편적이고 지속적이라고 말하겠지만 가치와는 무관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세상에 나왔으니 한번 폼 나게 살아보자.
어느 정도 성장한 사람들은 이런 말들을 마음에 두거나 하며 살아간다. 폼이 무슨 폼이냐 하는 복잡함은 있겠지만 모두가 단지 폼 나게 살고 싶어 하는 것은 본성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성장과 무관하게 배어나는 폼은 일정한 가치를 품게 되는데 성숙과 연관도 가진다.
최근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와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말이 있었다. “얼마나 산다고, 폼 나게 살다 죽어야 하지 않겠느냐” 그동안 폼 나게 살기를 거부했든지 아니 폼 나게 살았지만 자기가 원하는 폼 나게는 아니었나보다.
어쨌든 이 세대가 직면한 사회적, 인류적 짐을 벗길 해결사적 폼 나게를 기대했지만, 이제라도 좋은 옷을 사고 좋은 곳을 찾아다니고 매일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살다가 죽어야지. 그렇게 내가 나를 위해 폼 나게 살다가 죽을 거야라고 말했다.
학창시절 친구가 했던 말 중에 듣기 좋은 말이 “너 폼 난다”였다.
방과 후 위아래 검은색 학생복을 입고 친구들과 집을 향한 버스좌석에 앉았는데 그 정류장에서 모두가 쳐다보는 여학생이 버스에 올랐다. 그 여학생의 무거운 책가방을 들어준다는 남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단지 거절을 당할까봐 그리고 주의 시선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여학생의 가방을 당겨 자기 무릎에 놓았을 때 “그 짜식 폼 나네”였다. 만약 여학생이 손에서 가방을 놓지 않았다면 버스 안은 한바탕 소동이 일었을 것이다.
사람들에게 폼 나게는 중요하다.
키가 크고 얼굴이 잘 만들어졌어도 전혀 폼 나지 않는 친구에 비해 너는 뭔가 다르다는 그 말은 단지 외적인 변화나 모양새를 이야기하는 것만이 아니었고 나름 내적 프레임이 쉬어져있었다.
폼 단어를 영어로 찾아보니 Style로 번역되는데 a manner of doing something이라 말한다. 쓰임에서 폼 나게는 프레임이라고 이야기 했지만 일시적 또는 영구적 추구 원리 아래의 a manner of로 진화 된 것 같다.
1세기 마가는 그의 책에서 예수님의 제자들, 바리세인, 서기관들 그리고 정치가나 헤롯왕까지 폼 나게 사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각자가 폼을 재고 살고 있었는데 전혀 폼 나지 않았다. 아니 수제자 베드로는 폼 나게는커녕 맹세하면서까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찌질 함까지 보였다.
그에 비해 예수님은 정말 폼 나게 살았다.
예수님이 병자를 고칠 때 폼이 났다. 안식일에 대해 왜곡을 바로잡을 때도 폼이 났다. 귀신을 쫓을 때 폼이 났고, 죽은 아이로 딸을 살릴 때도 폼이 났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개로 남자 오천 명을 먹일 때 폼이 났다. 만민이 기도하는 집 예배당을 정화할 때 폼이 났다. 만민의 죄 사함을 위해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 폼이 났고, 죽음에서 부활할 때는 제일 폼이 났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폼 나게 살고 싶어 하는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8:34-35)라고 꾸짖어 말한다. 하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아무리 상상해도 폼 나지 않을것 같은데 하며 모두들 돌아선다.
우리는 나름 폼 나게 살고 있다.
그렇지만 정말 폼 날 때는 원리로 예수를 따를 때이고 나의 유익을 버릴 때이고 용기를 가질 때고 이웃을 위해 행할 때이며 세상에서 그 가치를 제로로 인정받을 때이다.
정말 폼 나게 살아보지 않겠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