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에서 이사야서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지만, 예레미야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설교 또한 마찬가지다.
용서나 사랑은 몰라도 고난과 심판이란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심판으로 시작해 심판으로 끝난다.
예레미야서 1장에서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다고 말한다. 왜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을까? 답은 쉬어 보인다. 하나님 말씀은 제한적이지 않다. 모두에게 심판의 때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의지를 유다와 이웃 나라에게 그는 필연적으로 전해야했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세운 후 “살구나무”와 “끓는 가마”의 환상을 보여준다. 책의 방향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살구나무는 하나님이 스스로의 말에 신실함의 표시로 끓는 가마는 두 가지 이유로 유다가 당할 심판의 표시였다.
예레미야서에서 그의 번민은 짐작하기 힘들 정도로 과하다. 자의나 타의로 끌려 다니며 심판의 영향아래 유다 백성보다 더 큰 고통을 경험한다. 그는 심판의 대상이 아니라는 위로마저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다. 그는 눈물의 선지자였다.
유다는 멸망하고 백성들이 죽어가고 후반부로 갈수록 그 중에 구원받을 “남은 자”라는 개념 또한 극히 일부로 추려지는 더 소수의 개념으로 발전된다. 자기 생각을 의지하며 애굽으로 향하던 “남은 자”도 더 이상 “남은 자”가 아니었다.
50장은 바벨론과 같은 이웃 나라들 또한 하나님의 심판아래 있는데 이들 또한 두 가지 이유로 심판을 받는다. 51장의 심판 내용은 아주 디테일하다. 유다와 같은 이유이고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과 관계가 있다. 해 아래 일부 나라가 심판받았고 그리고 모두가 받을것이다. 하나님 통치를 벗어난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예레미야서를 마치면 하나님의 주권을 제외하고 심판의 때에 품게 되는 많은 질문을 가지게 마련이다.
하지만 질문은 오직 제한된 소수의 “남은 자”에게만 효력이 있다. 누가 “남은 자” 인가?
그들은 기도해야 하고, 고통당해야 하고, 인내해야 하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고 하나님이 스스로의 말씀에 신실했듯이 “남은 자” 또한 그 신실함에 반드시 신실해야한다.
나라와 사람들은 여전히 심판당하지만 다시 영광의 때에 “남은 자”에게 약속되었던 시온으로 부름을 하나님은 신실하게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