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형의 선택.
2023년 7월 텍사스의 더위와 나는 서로 닮아 있었다. 온도의 숫자가 높아지는 것만큼이나 나는 혼란한 소식들을 접해야했다.
나는 두 여동생과 막내 남동생이 있다. 남동생이 송사에 휘말렸었고 88세가 되는 아버지는 최근 간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고 있는데 고통을 호소하고 어머니는 장남인 나에게 모든 해결책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몇 주 전 어릴 시절 무척 친했던 사촌형의 죽음이란 선택이 나에게 전해지면서 이전 것은 단지 축복에 불과했다. 어쨌든 우리 모두는 살아있지 않은가.
형 소식을 전해 듣고 한동안 다른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믿어지지가 않았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다. 나는 가끔 형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좋은 기억이 전부였다. 한국을 방문하면 거창한 음식을 대접하고 형이 나에게 베풀었던 젊은 시절의 호의를 부풀려야하는 빚을 지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의 빚을 나는 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가 없는 것이다.
기억을 되 살려보니 형은 언제나 혼자였다. 큰아버지가 이혼하면서 형은 엄마에게 맡겨지고 그 엄마는 얼마 되지 않아 형을 친 할머니에게 버렸다. 내가 미국으로 와서야 형이 짧은 시간이지만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그 짧은 시간인데 아내마저도 온몸이 마비가 되는 사고로 인해 친정 오빠가 데려갔다고 했다.
형의 죽음과 함께 날아온 또 다른 소식은 남겨진 빚이 2억이 된다는 것이다. 빚은 형에게 엄청난 멍에였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 한 끼까지 걱정 해야만 했을 것이다.
죽음을 선택하기 1주일 전쯤에 형은 누구에게 전화를 했었다. “ ..! 나 이제 그만 살아야 할까봐”
얼마나 두려웠을까?
욥은 자기가 겪는 고난과 고통에 대해 “자기의 생일”을 저주하면서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어찌하여 내 어머니가 해산할 때에 내가 숨지지 아니하였던가” (욥3:11)라고 울부짖는다.
세상은 형에게 그저 잔인했고 형은 어두운 세상에서 빛의 면들을 볼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동안 나는 몇 번의 한국방문에도 짧은 일정이란 핑계로 형을 만날 기회를 만들지 못했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되지. 이제 형과 다음을 기약할 수 없게 되었다.
형은 오랫동안 나를 기다렸을 것이다. 아니 기다리다 나를 지웠는지 모르지만 나는 너무 오랫동안 다른 이유로 형을 피한 것이 되어버렸다. 미안해.
전도자는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1:2)라고 책의 서문을 시작한다. 분명 이 세상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는 사람에게 어떤 유익이 있을까?
시간이 가고 이 지혜자는 이런 결론을 내린다. 사람의 본분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전 12:13)을 지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흙은 여전히 땅으로 돌아가고 영은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이것을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전에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에게 돌아가기 전에 말이다.
세상 모두가 빛을 볼 수 있게 되고 보게 되며 보게 되고 빛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좀 더 견뎌주었다면…, 그리고 우리는 견디도록 돕고 더 견뎌야 한다.
우리의 시간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