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가복음을 최초의 복음서로 간주한다.
전승에 기초해 마가가 저자(유세비우스의 인용)라고 보는데 베드로의 순교 직전이나 직후에 로마에서 70년 이전에 기록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본문은 70년에 발생한 성전 파괴에 대한 어떠한 진술도 포함되어 있지 않아 그 후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드실바는 청중에 대해 “19세기와 20세기 학자들은 복음서를 바울 서신들을 이해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갖고 있었다”라고 말하면서 특정 공동체의 역사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장점에 비해 사실 마가복음 본문의 빈약한 정보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이 복음서는1장 시작부터 이미 서른으로 성장한 예수님이 등장해 많은 기적과 표적을 행하고 말씀을 가르치는데 속도감이 엄청나다. 혜성처럼 나타나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사역을 시작한다. 이 사역은 흐트러지고 혼란한 본질들을 재정의 하는 과정을 통해 디테일한 “하나님 나라”의 미래와 현재성을 보여준다.
1장부터 발생하는 긴장은 백성들의 예수님에 대해 “서기관들과 같지 않고”, 서기관들의 예수님의 대한 “신성 모독이로다”(2:7)라는 표현들로 폭풍이 일 것 같은 전개의 방향을 일찍 알려준다.
핵심은 “하나님 나라”(1:15)와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1:1)지만 1세기 유대인들이 기대한 틀을 벗어난 외면당하고 처형당한 메시아의 본을 가르치고 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지속적으로 자기 정체를 숨김에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다. 그는 이사야와 연관시켜진 구약에서 지명된 메시아가 분명하다. 하지만 당시 세속적인 이해와는 달리 이 메시야는 반드시 버려지고 고난당하고 죽어서 부활해야한다. “독립을 회복하고 지지자들을 권세와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힐 신적으로 기름부음 받은 군사적 지도자와 왕” 그런 세속적인 이해에서 예수님은 외면된 메시아였다.
마가는 메시아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말하고 있다. 제자나 우리 모두는 자신들의 왜곡된 이해를 바꾸어야만 한다는 요구가 절실하다. 이것은 예수님의 본질적인 사명과도 맞아떨어진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달려 죽고 부활하는 예수님이었던 것이다.
메시아의 목적은 10장 45절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라고 선포하고 있다.
제자로서 이런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메시아와 같은 길을 걷는 바른 이해와 실천이 된다. 하지만 예레미야를 막 끝내고 마가복음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우리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두 책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바로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보인다.
슈바이처는 예수님을 “실패한 메시아”로 보고 아프리카로 향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전히 이 시대는 비록 악한 세상에서도 누려야할 “하나님 나라”나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잘못 이해하고 마가복음속의 제자들이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지 못한 이유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지 말고 “살아”(16:7) 나신 그를 제자들과 함께 찾아 나서 만나라고 주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