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마리와 그 능력(예레미야 36장)
예레미야 36장은 여호야김 왕의 통치 4- 5년차에 발생한 사건으로 하나님 말씀이 기록되는 과정과 기록된 두루마리의 내용을 듣는 왕의 반응을 포함한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사역 시작부터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 말씀을 두루마리에 쓰게 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목적은 유다 백성들이 이것을 듣고 악으로부터 떠나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하나님의 용서가 이루어지는데 이런 결과의 첫 단계가 무엇인지 본문은 보여준다.
예레미야의 대필자(서기관) 바룩은 예레미야가 불러 주는 대로 먹(탄소계열의 재료)으로 두루마리에 기록했다. 예언 말씀의 책이 완성 된 것이다. 이 두루마리는 당시의 일반적인 재료인 양피지나 파피루스로 만들어졌을 것이다.
완성된 두루마리는 금식하는 날에 성전에서 백성들에게 바룩으로부터 낭독되어졌다. 두루마리 낭독의 소식은 미가야에 의해 왕궁 서기관과 고관(고위직)들에 먼저 전달되었고(12절) 그들은 바룩을 불러 두루마리를 다시 읽게 하고 두루마리의 완성 과정을 듣게 된다.
본문 19절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들은 후 고관들의 반응부터 시작한다. 그 내용에는 29절로 보아 유다가 바벨론 왕에게 반드시 멸망하고 살아있는 모든 것들이 유린당할 것이라는 내용이 포함되어있었다. 내용의 심각성을 느낀 고관들은 바룩과 예레미야에게 숨을 것을 권장하고 두루마리를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에 두었다.
고관들은 당연히 왕에게 알려야했고 왕은 여후디에게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읽게 하고 왕과 여러 고관들이 모인 겨울궁전 불 피운 화로 앞에서 듣고 있는 것이다. 여후디가 몇 페이지를 읽고 나면 왕은 그것을 찢어서(베어) 불태웠다. 그곳에 있던 엘라단, 들라야 그리고 그마랴 세 사람이 말렸지만 왕은 듣지 않았다. 대신 책을 쓴 바룩과 예레미야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왕하 22장 1절은 단지 8세인 요시야가 왕이 되는 시점부터 통치과정을 설명하는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는 왕으로 언급한다. 요시야왕은 성전 수리 중에 발견된 율법책의 내용을 듣고서 그의 옷을 찢고 통곡했다. 옷을 찢고 통곡한다는 것은 자기 죄로 인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전통적인 행위다. 그리고 율법책의 내용을 유다와 예루살렘 백성에게 알리고 백성과 함께 지키기로 하나님과 언약을 세우며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점에서 반응은 이렇게 극명하다.
여호야김은 악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예루살렘 백성은 요시야 왕이 죽자 여호야김이 아닌 동생 여호아하스를 왕으로 추대했다. 이에 애굽 왕은 여호야김을 꼭두각시 왕으로 세우고 여호아하스를 애굽으로 잡아갔다. 여호야김은 당시 25세였고 그후 11년간 유다(왕하 23:36)를 통치했다. 그의 통치 3년차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공하고 여호야김에게 조공을 받치게 했다.
본문은 그가 처한 심리적, 정치적 상황을 언급하지 않는 대신에 단지 두루마리 말씀을 듣는 그 순간 두려워하지 않고, 옷을 찢지도 않고, 신하들의 옳은 조언도 듣지 않았다(24절)고 말한다.
이런 왕의 반응은 이미 예언된 심판적 내용에 더해진 추가 심판을 낳게 했다.
예레미야가 기록해야할 말씀은 또 다른 두루마리에 다시 기록되어졌고 여호야김에게 주어진 기회가 사라졌으며 심판이 추가되었다. 더 이상 그 후손이 왕위를 잊는 영광이 사라졌다. 그리고 아버지 요시야 왕과는 다르게 죽은 후 그의 시신이 길바닥에 뒹구는 모양새를 겪게 되었다.
서두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얻게 되는 첫 단계를 언급했는데 그것은 하나님 말씀을 “들음”으로 시작된다. 우리는 악에서 떠나거나, 회개를 먼저 생각하거나, 정직한 일을 하는 행위를 먼저 떠 올릴 수 있겠지만, 첫 단계는 하나님 말씀을 듣는 것이 가장 우선이 된다고 본문은 말한다.
하나님 말씀 없이 악한 행동에 돌아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도덕적 양심과 사회적 규율에 대한 학습과 비교해 보면 된다. 그 영향은 극히 제한적이며 결국 우리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없다. 효과적 변화의 근거는 하나님 말씀에서 시작되는 원칙을 여기서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요시야나 그의 아들 여호야김에게 같이 들려졌지만 한사람은 자기 옷을 찢고 다른 이는 말씀을 찢는 반응은 보였다. 우리는 잠시 불편할지라도 바른 반응을 보여야한다. 바른 반응의 요시야는 비록 므깃도에서 애굽 왕 바로 느고에게 살해당했지만 부하들에 의해 예루살렘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말씀(왕하 22:20)에 따라 그의 죽음은into thy grave in peace(shalom:평화, 복지)로 들어갔다. 일반상식과 사회적 제도로는 이런 실재를 가져오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때로는 구전으로 이렇게 두루마리로 후손들에게 전해지면서 잊히고 잃어버려져도 그 능력이 사라진 적이 없었다. 말씀은 영원하고 살아있다. 듣는 사람의 반응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여호야김의 미래적 죽음을 본문은 “그의 시체는 버림을 당하여 낮에는 더위, 밤에는 추위를 당하리라”(30절)고 말씀했다. 시체가 느끼는 더위와 추위 과연 죽음 후에 시체가 이런 것들을 느낄 수 있을까? 죽은 후의 삶은 말씀의 능력 앞에서 연장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금 두루마리에 담겨있고 우리가 살아있거나 죽어서도 같은 능력으로 역사한다. 두루마리 말씀을 생명과 심판의 말씀으로 듣고 바른 반응을 보여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