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마가복음 11장 17절 말씀이다.
유월절이 다가오자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예수님이 성전을 방문했을 때 성전 안에서 일어난 바람직하지 않는 일들에 대해 가르침을 실행했던 사건이다.
예수님이 보고 경험한 성전안의 실상은 가난한자와 약한 자들을 착취하는 서기관들과 장로들이 있고 부를 쌓는 대제사장들이 있었다. 제사장의 묵인아래 성전 안에서 희생제물 매매의 전권을 소유한 상인들, 가난한자들의 희생제물인 비둘기 값은 바가지가 씌어져 가난한자나 이방인들에게 큰 짐을 지우고 있었다. 여호와를 커튼으로 가리고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거짓된 소망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에게 언제나 온화하고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 같은 예수님은 성전 안에 있는 상인들을 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다. 상식적으로 이런 행동은 웃으면서 겸손한 행동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수님은 머리끝까지 화가 나셨다.
본문에 오직 예수님만이 화가 났고 기타 제자들이나 성전의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그리고 비둘기파는 자들은 그런 일에 대해 무감각함을 보여주고 있다. 성전안의 이런 비행이 생기고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는 교만한 권력으로 부터 그리고 왜곡된 법 해석으로 부터 제도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메시아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성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 것일까?
하나님 말씀을 대변하는 하박국 선지자는 “오직 여호와는 그 성전에 계시니 온 땅은 그 앞에서 잠잠할지니라 하시니라”(2:20)라 말하는데 성전에는 하나님이 “is in” 현재하고 있다고 한다. 또 본문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성전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교제를 위한 곳이다.
성전은 하나님이 상주하고 있고 백성들과 기도로 관계를 가지는 용서와 화합과 소망을 가지는 곳이 성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강도의 소굴”이란 표현에서 성전은 강도들이 모인 소굴이고 성전의 강도는 백성들의 소유를 부당하게 하나님과 성전을 무기삼아 착취하고 있었다. 이 일은 “ have made” 과거 시점부터 현재까지 계속 진행되고 있다. 유대사를 쓴 요세푸스는 대제사장 아나니아를 “ 큰돈을 모으는 자”라고 표현했다. 부정, 착취, 교만, 월권, 협박, 무지 이런 일들은 성전에서 일어나는 상시적인 일이 되었고 단지 거대한 성전 외벽의 위압감은 그것을 감추기에 충분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성전에 계신 하나님이 원하는 것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호6:6)라 대변한다. 자비가 넘치는 성전이어야 하는데,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기쁨과 소망으로 만나는 곳이어야 하는데 예루살렘 성전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제사장들이나 백성들 모두 왜곡된 성전 사상에 물들어 있었다.
마가는 이런 왜곡된 성전사상을 오직 예수님의 고난의 십자가로 바로 잡는 사건 예수님 스스로가 성전이 되어야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상주하는 성전이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를 향한 편지에서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라고 말한다.
오늘 하나님이 상주하는 성전인 나는 혹시 “강도의 소굴”로 아니 공동체의 강도로 있으면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고 말하는 것이 아닌지?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마음 중심과 행동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이 마셨던 잔을 마셔야하고 남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하고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한다.
하나님이 내 안에 있으니 믿음으로 그의 뜻대로 살고 기도로 그와 교제하는 본질과 역할을 오늘 예수님은 그의 성전 되심과 고난의 십자가를 통해 가르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