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형제 막내에게 생각하지도 못했던 일이 생겼었다.
그는 50년을 살면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법적인 문제로 곤란에 빠져있었고 며칠을 혼자 고민하다 자신의 상황을 형제들에게 알렸다.
이제 더 이상 자신만의 문제가 아니라 형제 모두의 문제가 되었고 집안의 문제가 된 것이다. 이런 변화는 일반적인 가족관계에서 당연한 과정일 것이다. 형제의 일이 내일이 되고 특히 결과가 형제의 개인 생활에 큰 영향을 주거나 사회적 비난 대상이 된다면 집안도 모른 체하기는 어렵다.
물론 이 사회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면 사회법을 무시하기도 그리고 법률이 해석하는 범죄에 대한 단죄를 가볍게 여기는 풍조지만 막내는 그렇게 단단하지 않았다.
법에 대한 전문가가 필요했고 변호사 선임을 위해 누구라 할 것 없이 형제 모두가 경제적인 지원을 자원했고 이루어졌다. 형제 모두는 하나가 되었고 21세기 문명은 한국과 미국이라는 거리를 없애 버렸다.
거의 매일 형제들에게 오가는 전화는 평범했다. “힘내야한다” “정의는 살아있다” “막내는 잘못한 게 없다”등등 단순하고 많은 경우 일방적이기도 했다. 미국에 거주하는 나는 보다 현실적인 조언을 해야 했다. 때로는 사회가 정치적이고 편협하고 이기적인데 그것을 상대로 이기려면 적절한 무기가 필요했다. 무기는 모두가 알고 있는 돈이나 권력이나 인맥 그리고 상대 보다 큰 힘을 가진 인위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나에겐 그런 것은 없다. 하지만 진실과 일관성은 역사가 말하는 최고의 무기다.
나는 가장 현실적인 조언으로 진실과 하나님을 선택했고 공정한 결과를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고 기도해 준다는 것이 가장 큰 무기였다. 나는 매일 아침 하나님에게 그의 공의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했다.
결과는 막내에게 잘못이 없다는 판결로 마무리가 되었다.
나의 하나님은 나를 실망시킨 적이 없다. 이제 모두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과거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점이지만 우애 돈독한 두 자매에게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이것은 분명 일시적일 것이다.
그동안 막내 동생을 위해 자매간 통화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이 무시되었다고 서로 느끼고 있었다. 서로의 관심은 자기만의 주장이 전부였고 상대를 배려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막내 동생이 되찾은 심리적 자유와 모두가 원하는 결과를 얻었는데 두 자매는 이제 서로 말도 안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일이든지 사건 뒤에 따라오는 이면적인 결과나 후유증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의도 자체가 숨겨진 이면 일 수도 있다.
아마 막내 동생의 사건은 본질이 두 자매의 우애가 돈독함을 시기한 못된 놈의 시기질투였을 것이다. 그리고 시작을 무고한 막내 동생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 위협이나 도발은 우회적일 때가 많다.
두 여동생에게 나는 무엇이 중요한지 잘 생각해 보자고 이야기 하고 있는 중이다. 돈은 가장 쉽게 버릴 수 있어야 한다. 혹시 막내 동생에게 다른 결과가 나왔다고 해도 우리 형제들은 그에게 변함없이 힘을 싫어줄 수 있었다. 하지만 승리에도 불구하고 자매들의 우애를 깨는, 관계를 무너뜨리는 현실은 우리에게 더 치명적이다.
우리 형제들은 남부럽지 않은 우애를 지니고 있었다.
두 여동생의 말을 중립적인 입장에서 들어야하는 나는 기약 없는 박쥐가 되어있다. 이해하고 싶지 않아도 서로는 이해해야한다. 또 서로는 각자가 버려야 할 것을 버리는 용기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두 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막내에게 그랬듯이 이번에도 가장 현실적인 도움이 기도를 통해 올 것이기 때문이다.